마리 바레이유 지음 | 최윤정 옮김
국판 (148*210) | 346쪽 | 값 17,800원
발행일 | 2023년 9월 30일
펴낸곳 | 바람의아이들
ISBN | 979-11-6210-212-1 [44800]
SET ISBN | 978-89-90878-04-5
스파게티 신드롬
아빠, 농구 선수의 꿈, 내 인생의 찬란한 목표
그리고 어느 날, 내 삶을 뿌리째 뒤흔들어 놓은 사건
일류 사립 고등학교에 다니며 농구 선수로 활약하는 레아의 삶은 온갖 기쁨과 기대로 충만하다. 농구에 대한 열정과 재능, 딸을 위해 헌신하는 아빠, 사회적으로 성공한 엄마, 깍쟁이 여동생, 똘똘하고 야무진 단짝 친구, 짝사랑하는 남사친까지. 비록 학교에서는 ‘익명의 학생 1’에 지나지 않고 짝사랑하는 남사친 ‘니코’가 아직 여러 여자애들을 만나며 진짜 운명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앞으로의 인생 계획으로 꽉 차 있는 지도가 있는 한 두려울 건 없다. 무엇보다도 농구 코치인 아빠가 언제나 함께하며 도와줄 테니까. 프로 농구 선수를 꿈꾸며 남자팀에서 주전으로 뛰느라 여자 팀 동료들과 등지게 되었다거나 요양원에 계신 할머니의 치매가 나날이 심해진다거나 하는 등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모든 삶이 완벽할 순 없다. 레아는 미국 여자 농구 리그에서 뛰겠다는 목표를 북극성처럼 바라보며 하루하루 열심히 농구 코트를 누빈다. 레아도 알고 있다시피,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고 어떻게 해야 할지 길이 보인다는 건 아무나 누릴 수 있는 행운이 아니다.
프랑스 청소년소설 『스파게티 신드롬』은 고등학교 남자 팀에서 주전으로 뛰는 농구 천재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지만 단순한 스포츠물이 아니다. “안녕, 나야. 우리 못 본 지 좀 됐네.”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 글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거의 모든 걸 가진 주인공 레아가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고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오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린아이가 성장하고 어른이 되어 가는 동안, 또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동안 어떤 종류든 상실과 슬픔을 겪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어떤 상실은 삶을 뿌리부터 흔들어 버린다. 이를테면 레아에게 닥친 아빠의 죽음이 그렇다. 갑자기 쓰러진 아빠가 구급차 안에서 숨진 것만으로도 온 세상이 무너지는 듯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레아와 여동생 아나이스도 아빠와 같은 유전적 질환이 있다고 진단받은 것이다. 마르팡 증후군은 레아에게 농구 선수에 걸맞는 큰 키와 기다란 손가락을 주었지만, 아빠처럼 심장 대동맥이 파열될 위험 때문에 레아는 더 이상 농구를 할 수 없게 된다.
애초부터 레아에게 아빠와 농구는 하나였고, 한덩어리로 존재하며 레아의 삶을 꽉 채우고 있었다. 레아가 계속해서 땀흘려 뛰고 농구 시합에 나갈 수만 있었다면 어떻게든 괜찮았을 것이다.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고 시간이 걸리겠지만 아빠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고 마침내 상실의 슬픔을 이겨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빠도, 농구도, 인생의 목표도 모두 잃어버린 지금 레아는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더 이상 농구를 할 수 없다면 레아는 어디에서 위로를 받고 어디에서 힘을 얻어야 할까?
섞이고, 부서지고, 어떤 때는 망치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맛있는
어떤 스파게티와 인생에 대한 이야기
『스파게티 신드롬』은 주인공 레아가 자신에 닥친 불운에 맞서는 이야기다. 레아에게 닥친 일들은 근본적으로 원상회복이 불가능하다. 레아는 아빠의 무덤을 찾지 않고 하루치 알약을 몰래 변기에 흘려보내는 것으로 현실을 외면하지만 그런 식으로 문제가 덮어질 리 없다. 아빠가 없는 일상은 이미 뒤죽박죽이 되어 애써 손을 내밀어주는 가족도, 친구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결국 레아는 자신의 사정을 모르는 새로운 친구들을 통해 치유를 시도한다. 우연히 만난 길거리 농구 팀과 엄마 몰래 농구를 하고, 아빠의 조언을 전달하는 것처럼 코치 노릇도 시작한 것. 한편, 사려 깊고 다정한 농구 소년 안토니와 사랑에 빠져 설레는 나날을 보내기도 한다. 경기에 대한 부담 없이 하는 농구의 재미도 느끼고, 난생 처음 진짜 사랑을 경험하는 동안 레아는 조금씩 상실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다.
하지만 아빠가 살아 있는 척, 농구 선수로 꾸준히 훈련받고 있는 척, 자신의 삶에 아무 문제도 없는 척하는 가짜 삶은 온전한 것이 아니다. 레아가 외면하는 동안 가족에게는 더 큰 문제가 발생하고, 사랑하는 안토니에게 그 어떤 이야기도 털어놓을 수 없기 때문에 둘 사이의 관계도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 진짜 삶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레아는 아빠와 농구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지만 어쩌면 삶은 식탁 위에 쏟아진 스파게티 국수 같은 게 아닐까? 레아의 할머니는 식탁 위에 스파게티 면을 쏟고 엉망진창인 자기 삶을 되돌아보는 레아에게 말한다. “스파게티는 익으라고 있는 거야. 그러면 섞이고, 부서지고, 어떤 때는 망치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맛이 있지.” 상자 속에 얌전히 들어 있는 직선의 스파게티 면들은 서로 만날 수 없고, 그래서 지겹고 무엇보다도 맛이 없다. 그러니 스파게티는 단숨에 쏟아지거나 냄비 속에서 뒤섞인 채 익어 가야 할 것이다. 온갖 일이 다 일어나는 바로 우리의 삶처럼.
레아가 방향을 잃고 잠깐 휘청거릴지라도 아직은 괜찮다. 사실, 레아의 삶은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도 아니니까. 농구 선수의 꿈이 플랜A였다면, 이제 플랜B가 아닌 또다른 플랜A를 시작할 수도 있다. 『스파게티 신드롬』은 주인공 레아가 자신에게 닥친 불운에 맞서는 이야기이자 상실과 애도에 대한 이야기이고, 스포츠물이자 로맨스이다. 또 미국 여자농구 리그 WNBA 진출을 꿈꾸며 매일매일 훈련에 매진하는 당차고 건강한 십대 레아의 이야기이고, 가난과 범죄의 언저리에서 평온한 삶을 꿈꾸는 안토니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레아를 둘러싼 어른들과 친구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좋은 장편소설이 으레 그러하듯 이 작품 역시 사람과 사람이 만나 영향을 주고받고 감정을 어루만지며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가닥가닥 엮어 하나로 담아낸다. 아빠의 죽음을 애도하며 부정과 분노, 수용의 단계를 거치는 레아에게 안토니가 없었다면, 엄마와 동생이 없었다면, 친구들과 농구 코치가 없었더라면 이야기는 이와 다르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스파게티 신드롬』은 마르팡 증후군이라는 생소한 유전 질환과 농구를 소재로 하면서도 보편성을 지닌 여러 층위의 이야기를 깊고 단단하게 다룬다. 청소년뿐 아니라 삶의 방향과 고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가 닿을 만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