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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아이이고 싶은 적 없었어

쥘리 델포르트 지음 | 윤경희 옮김

변형판 (150*190mm) | 260| 23,800

발행일 | 2023127

펴낸곳 | 바람북스

ISBN | 979-11-973817-5-1

여자아이이고 싶은 적 없었어

  • 소설가 최진영, 평론가 윤경희 추천!

    이 책은 나를 훼손하지 않는 언어를 찾고, 만들고 싶게 한다.” - 소설가 최진영

    여성 예술가에게 창작 수첩은 부당한 세계를 향한 의문과 감정을 쏟아내는 밑바탕이자 그것의 질서를 깨뜨리고 뒤집는 싸움의 도구가 될 수 있다.” - 문학평론가 윤경희

     

    내가 여자아이라는 게 속임수 같다

    이 세상에서 이상하고 낯선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

     

    우리가 사는 세상의 기본값은 남성이다. 인류의 역사가 몇몇 남성들의 이름으로 구축되었다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신문 기사 속 인물의 성별을 나타낼 때처럼 여성은 언제나 예외로서 괄호 안에 들어가 있다. 하다못해 의복이나 가구, 피아노 건반 같은 것들도 표준적인 남성의 체격에 맞춰져 있으니 여성들은 늘 사소한 불편함과 난처함쯤은 감수하며 살아간다. 늘 가외의 존재로 살아간다니, 참 이상하다. 여성들에게, 혹은 표준적인 남성이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세상에 잘 맞지 않는다는 낯설고 이상한 느낌은 아이러니하게도 꽤 익숙한 것이다.

    그래픽노블 여자아이이고 싶은 적 없었어 여성의 삶에 대한 매우 사적인 사색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아이를 낳고 싶다는 소망은 파트너 남성에 대한 사랑과 섹슈얼한 즐거움 너머로, 여성의 삶에 대한 사색으로 이어진다. 여성을 어딘가 부족하고 결핍된 존재로 상상한 것은 남자들이다. 여자가 남성의 삶을 선망하고 결핍을 채우기 위해 아들을 원할 거라니, 그런 바보 같은 분석이 어디 있을까. 작가가 갖고 싶은 것은 남자아이가 아니라 여자아이다. “아들로 뭘 하겠어?” 하지만 여자가 아이를 갖는다는 건 결핍을 채우고 충만해지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한쪽으로부터 허무는 일일지도 모른다. 남자들은 여자 혼자 아이를 돌보게 하고 아기는 여자가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쓰는 일을 방해할 테니까. 남자는 아이를 낳지도 돌보지도 않고 아빠가 될 수 있지만 여자는 아니다.

    작가는 묻는다. “내가 여자아이라는 게 속임수 같다고 느껴진 것은 몇 살 때였더라?” 여자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낯설고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여자란 본디 어딘가 부족한 존재라서? 천만에. 연달아 부조리한 상황을 맞닥뜨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터득하는 감각이 있다. 남성 중심적인 세상에서 여자로 태어나 살아가다 보면 늘 부당하고 원통한 일이 많다. 이상하고 낯설고 억울하고 서글픈 감정은 여성의 삶에 있어서 기본값이다. 따라서 질서정연하고 논리적인 이야기 방식으로는 여성의 서사를 진행시키기가 어렵다. 여자아이이고 싶은 적 없었어 파편적이고 두서없이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이유다. 작가는 끝없이 질문을 하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여행을 하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다. 그리고 바느질을 하듯 그런 조각들을 이어 이야기를 만든다.

     

    우리는 어떤 이미지들의 포로인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고 존재하는 방법에 대하여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이 그렇게 혼란스러운 일인데 이 세계 내에서 던지는 질문은 과연 남성 중심 질서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표준화된 남성의 삶에 맞춰진 세상에서 온전히 여성으로 살아간 사람이 있다면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무민 시리즈의 토베 얀손이 불려나온다. 작가는 토베 얀손의 흔적을 찾아 핀란드에 가서 머물며 숲을 여행하고 고양된 감각을 느낀다. 혜성을 맞이하던 무민들은 정말 바보처럼 평화로웠겠구나. 한편 토베 얀손이 그 시절 남성과 결혼하지 않고 여성 파트너와 해로하며 삶을 즐길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술과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지와 언어는 혼란스러운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작가는 죽거나 아직 살아 있는 여성 예술가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그들의 삶을 궁금해 하며, 어째서 여성 예술가들이 남성 예술가들보다 더 고통받는지 묻는다.

    작가는 온갖 이미지들과 혼란스러운 질문들을 제시하는 동시에 여성의 삶에 대해 끈덕지게 붙잡고 늘어진다. 자유분방하게 끄적거린 듯한 색연필화는 유연하고 체계적으로 구성된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대신 파편화되어 낱낱이 흩어진 이미지를 통해 사방에 존재하는 질문들을 드러내준다. 어떤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여자들이 한 일 같다고 농담을 하는 아버지, 아이가 생기면 이름은 지을지언정 온전히 맡아 돌보겠다고 약속하지 않는 남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릴 때부터 당하는 성폭력, 여자들이 당하는 피해는 으레 못 본 척하는 은밀한 수군거림들. 작가는 여러 나라, 여러 장소를 옮겨다니며 다른 예술가들의 소식을 듣고 그림을 그리는 와중에도 쉬지 않고 여성의 삶에 대해 질문한다. 따라서 작가가 그리는 그림과 작가가 쓰는 문장들은 그 자체로 여성의 작업이 된다. 모든 예술과 언어가 많은 여백을 갖고 심층에 여러 겹의 의미를 지니고 있듯 여성의 삶도 그렇다. 어쩌면 의문을 갖고 질문을 하고 안주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여성으로서 온전히 사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남성 명사와 여성 명사가 따로 있는 프랑스어에서는 프랑스어 여성 명사와 남성 명사를 하나의 형용사로 수식할 때, 남성형 형용사가 그 두 가지를 모두 수식한다는 규칙이 있다. 세상의 모든 규준이 그렇듯 남성이 기본값이라는 점을 더할 나위 없이 간결하게 표현해주는 문법이다. 여자아이이고 싶은 적 없었어의 프랑스어 원제는 ‘Moi aussi, je voulais l'emporter(나도 대표하고 싶었다)’로 이 문법 규칙에서 착안한 것이다. 언제나 대표 값이 되지 못하는 여성이 온전한 삶을 욕망하는 의미를 담았다. 이후 영어로 번역되면서 'this woman's work'가 되었는데 원서 제목을 포함하여 이 그래픽 노블이 담고 있는 모든 작업을 ‘woman’s work’로 규정한 셈이다.

    여성에 대해 생각하고 창조하고 생산하는 일은 지극히 사적인 동시에 페미니즘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는 일이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단순히 여성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표가 될 수 없는 모든 존재들-헤테로 남성이 아니고 백인이 아니고 부유하지 않고 나이 들고 장애가 있고, 더 나아가 비인간인 모든 존재들에 대해 생각하는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서툴더라도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자기 안의 혼란을 고요하게 들여다보고 싶은 모든 여성들과 대표가 되지 못해 슬픈 모든 존재들에게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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