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디트 바니스텐달_지음, 김주경_옮김 | 변형판 (192*256) | 160쪽 | 값 25,000원 | 발행일 2021년 10월 11일 | 펴낸곳 바람북스 | ISBN 979-11-6210-116-2
페넬로페: 전쟁터에서 돌아온 여자
전쟁터에서 돌아온 여자
여행 가방을 풀자, 죽은 소녀가 나왔다
아주 오랫동안 남자들이 세상을 떠도는 동안 집을 지키는 것은 여자들의 몫이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도 남자들은 모두 집을 떠나 있다. 트로이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신의 노여움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자, 아들인 텔레마코스도 아버지를 찾아 집을 떠난다.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 주위에 몰려든 구혼자들 역시 따지고 보면 제 집이 아닌 곳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페넬로페는 남편과 아들이 없는 집에서 온갖 유혹에 시달리며 꿋꿋이 버티는 인물이다. 여자들이 어머니나 아내로 형상화되고 집과 고향에 붙박인 존재로 여겨진 것은 아주 오래된 일이다. 집밖으로 나와 자기 몫의 직업과 재산, 명예를 갖게 된 여성이란 지극히 현대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벨기에 작가 유디트 바니스텐달의 그래픽노블 『페넬로페:전쟁터에서 돌아온 여자』는 그리스의 서사시를 뒤집어 현대적인 버전으로 재탄생시켰다. 이 작품에서 집을 떠나는 사람은 여자이자 엄마인 페넬로페다. 인도주의 의료단체에서 일하는 외과의사 페넬로페는 수시로 폭격이 일어나는 시리아에 머물며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휴가 기간에만 얼마간 집으로 돌아가 남편과 딸을 만난다. 폭격을 맞아 피를 흘리는 시리아 소녀는 시를 쓰는 다정한 남편이나 이제 막 사춘기에 이른 귀여운 딸만큼이나 페넬로페의 삶에서 중요한 요소를 이룬다. 페넬로페에게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당장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의사로서 자아실현을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인류를 위해 이바지한다는 좀더 고귀한 삶의 목표와 의미에 관련된 일이기도 하다. 비록 중동 지역의 분쟁은 근본적인 원인 해결이 요원하고, 수술에 실패해 어린 소녀의 죽음을 보는 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지만 페넬로페는 자기 일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벨기에 집으로 돌아와 평화롭고 세속적인 일상을 맞닥뜨리는 순간, 페넬로페의 삶은 중심을 잃고 흔들린다. 과연 진짜 내 자리는 어디인가.
이야기는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 동안 페넬로페가 겪는 혼란과 불안을 그리는 데 집중한다. 벨기에 집으로 돌아와 짐을 풀자 가방 안에는 페넬로페가 치료하다 결국 죽어버린 시리아 소녀가 들어 있다. 물론 페넬로페는 죽은 소녀가 실재할 수 없으며, 부부의 침대 속까지 따라와 눕는다는 게 현실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심리 상담을 해봐도 딱히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시리아 소녀는 페넬로페가 마음 편히 느긋하게 휴가를 보내는 걸 바라는 것 같지 않다. 페넬로페는 소녀를 옆에 둔 채 벨기에에서 보내는 안온한 삶을 미심쩍게 바라본다. 그저 길을 걷다가도 폭탄에 맞아 죽을 수 있는 위태로운 소녀에게 라틴어 시험과 남자친구 문제로 고민하고 새 외투를 사러 엄마와 함께 외출하는 벨기에 십대 소녀는 얼마나 먼 존재였을까. 크리스마스 트리와 와인에 대해 고심하고 밤새 책상 앞에 앉아 시를 쓰는 태평한 삶이란 이미 죽어 버린 시리아 소녀에게 얼마나 아득한 일이었을까. 페넬로페는 이 두 세계 사이를 오가는 유럽 지식인으로서 두 세계의 간극과 거리를 예민하게 감지하며 괴로워한다. 말하자면 페넬로페에게 진득하게 따라붙는 시리아 소녀의 환영은 페넬로페가 짊어진 죄의식인 셈이다. 이때 페넬로페가 느끼는 죄의식은 오래전 유럽 제국주의가 피식민지에 저질러놓은 악에 대한 원죄 같은 것이다. 이 도저한 죄의 대가를 어떻게 치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