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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와 그림자

이은영 지음 | 변형판형 (290*212) | 38쪽 | 값 15,000원 | 발행일  2021년 7월 26일 | 펴낸곳  바람의아이들| ISBN 979-11-6210-112-4

미루와 그림자

  • 낯선 세상, 길 위에서 친구를 만나다

    멀게는 <오디세이아>의 오디세우스부터 가깝게는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까지, 이야기 속 인물들은 언제나 길을 나선다.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테니 이야기가 시작되려면 반드시 첫걸음을 내디뎌야 하는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목적지가 있든 없든 길 위에 서고 나면 걷게 마련이고, 길을 나선 인물들은 또다른 누군가를 만나곤 한다. 운이 좋으면 길동무를 사귈 수도 있다. 함께 걷는 누군가가 있다면 길은 더 이상 막막하거나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길 위에서 인생을 본다.

    이은영의 그림책 <미루와 그림자>도 주인공 미루를 길 위에 세움으로써 이야기를 시작한다. 미루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떠나고 싶어졌다지만 집 떠나기는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길을 나서기로 결심하는 순간, 미루가 무엇을 두고 떠났는지, 미루의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길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고 미래를 향해 뻗어 있지 않던가. 미루가 길을 나서면서 비로소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미루가 그림자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집을 떠난 덕분이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그림자는 그리 근사한 친구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혈혈단신으로 길을 나선 미루에게는 하나뿐인 친구가 되어준다.

    그림자는 배고픈 미루에게 사과를 따주고, 미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림자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사과 한 알이나 잠깐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정도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리는 없겠지만 하나보다는 둘이 있을 때 세상은 좀더 따뜻해질 수 있다. 게다가 미루는 그림자를 만나 새로운 목표를 찾은 셈이다. 미루에게는 목적지도, 길을 떠나는 이유도 분명치 않았지만 그림자의 주인을 찾아주려고 애쓰는 동안 미루는 뜻밖의 경험을 하고 낯선 세상을 만난다. 그림자의 슬픔과 외로움, 허기 등은 미루의 것이 된다. 미루는 그림자의 친절을 마음에 새기며 사과라는 이름도 지어준다. 그리고 마침내, 미루는 자신의 비밀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런데 미루야, 너도 그림자가 없어. 알고 있었니?”

     

    우리 무의식의 어두운 구석,

    당신의 그림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미루와 그림자>에는 길 떠나기에 대한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하다. 아름답게 채색된 그림은 미루가 걷는 길 주위를 양감으로 가득 채우고 있지만 어쩐지 세상은 텅 비어 보인다. 조그만 여자아이 홀로 목적지도 없이 길을 걷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거기에서 만난 길동무가 구부정하니 절망에 빠져 있는 그림자라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림자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서 미루와 그림자를 본 사람들은 꺅 비명을 지른다. “저 끔찍한 게 뭐지?” 사람들은 어둡고 형체와 경계가 불분명한 그림자를 용납해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림자란 햇빛 아래에서 으레 따라붙는 존재가 아닌가. 사람들은 그림자를 떼어 내는 데 골몰하고, 그렇게 버림받은 그림자들끼리는 또 사람 흉내를 내며 가짜 삶에 몰두하고 있으니 이만저만 이상한 일이 아니다.

    미루가 자신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몰라! 내 그림자 어디 간 거야?”라고 외친 것은 그림자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매정하고 비인간적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난처한 순간, 바로 옆에 그림자가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그림자를 잃어버린 미루와 주인에게 버림받은 그림자는 이제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된다. 서로를 돌봐주고 서로에게 결여된 부분을 메꿔 주는 존재가 된다는 점에서 미루와 그림자는 진정한 반려자로 거듭난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세상은 아름다운 노을로 가득하다가 이윽고 해가 저물고 환한 달이 떠오른다. 달빛 아래에서 손을 맞잡은 미루와 그림자는 이제 한몸이다. 앞으로도 길은 계속되겠지만 조금은 덜 고단하리라.

    이은영은 독일에서 일러스트를 공부한 작가로, 어둡고 강렬하면서도 서사적인 그림을 통해 자기 실현을 향한 내면의 여정을 이야기한다. 기본이 탄탄한 일러스트가 텍스트와 어울리면서 만들어내는 효과는 미루와 그림자 이야기하고도 형식적으로 호응하는 듯하다. 글과 그림을 함께하는 신인 작가로 주목해 볼 만하다. 우리 모두는 홀로 길을 떠난 방랑자이고, 대개는 쓸쓸하고 막막하다. 그래도 길을 떠나야 세상에 대해 알게 되는 것처럼 걷다 보면 마음에 맞는 친구를 만나거나 낯선 경험을 통해 현명해지기도 할 터. 모든 출발점을 앞둔 어린이들은 물론, 하루하루가 새로운 길 떠나기처럼 여겨지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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