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 뒤에서
어린아이의 눈으로 본 홀로코스트
1942년 프랑스 남부에 비시 정부가 수립되자 갑자기 유태인은 공공의 적이 되어 여기저기에서 공격받는다. 그래픽노블 『커튼 뒤에서』는 이 시기 어린이의 눈에 비친 전쟁의 혼란과 고통을 그려 보여준다. 유태인 엄마와 비유태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야엘에게 세상은 비밀을 잔뜩 숨기고 있는 커튼처럼 알 수 없는 곳이다. 하늘에서 폭격이 쏟아져 내리고 죄없는 사람들이 줄줄이 끌려가 죽임을 당하는 무도한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건, 어른이 된다는 건 무슨 의미를 지닐까.
#그래픽노블 #인종주의 #홀로코스트 #2차세계대전 #나치 #유태인 #유년 시절 #프랑스 비시 정부
세상의 많은 비밀은 커튼 뒤에 숨어 있다
어린아이의 눈으로 본 홀로코스트
2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6월 13일, 나치 독일이 프랑스 파리를 점령한다. 그리고 불과 열흘도 안 되어 6월 22일 1차세계대전의 전쟁 영웅 필리프 페탱에 의해 휴전 협정이 맺어진다. 이때로부터 1944년까지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는 ‘비시 프랑스’, 즉 나치 독일의 괴뢰 정권이 통치하게 된다(프랑스 북부는 독일이 직접 점령하여 통치했다). 프랑스 혁명 이래 견지해온 ‘자유, 평등, 박애’ 대신 ‘노동, 가족, 조국’을 내세운 비시 정권은 4년 정도 유지되었을 뿐이지만 프랑스인들에게는 ‘비시 신드롬’이라고 불릴 만큼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반민주주의적이고 반인권적인 헌법 개정으로 수많은 프랑스인들이 고통받았고, 그중에서도 프랑스에 살던 유태인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기도 했던 것이다. 비시 정권에 의해 희생된 7만 명 이상의 유태인 가운데에는 어린이 11,000여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픽노블 『커튼 뒤에서』는 이 시기 어린이의 눈에 비친 전쟁의 혼란과 고통을 그려 보여준다. 유태인 엄마와 비유태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야엘에게 세상은 비밀을 잔뜩 숨기고 있는 커튼처럼 알 수 없는 곳이다. 외가 식구들이 잔뜩 모인 야엘의 여덟 살 생일 파티에서 아빠는 ‘고이goy’라고 불리는데 ‘비유태인’을 가리키는 단어에 어째서 조롱이 담긴 것처럼 느껴질까? 아빠의 부모님은 왜 야엘과 여동생 에밀리를 만나주지 않는 걸까. 커튼 뒤에서 아빠와 은밀한 만남을 갖는 금발 여성은 누구일까? 그리고 여성에게 좀 더 많은 정치적 권리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강인한 엄마는 왜 병에 걸려서는 그렇게 금방 죽어 버렸을까?
이야기의 무대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이고, 1937년부터 1942년까지 5년 사이의 시간을 보여준다. 엄마가 죽고, 아빠가 금발 여성과 재혼을 하고, 심통이 난 어린 자매가 순진한 새엄마를 골려주는 등 평범한 듯 유별난 듯 일상이 이어지는 동안 세계정세는 심상치 않게 흘러간다. 1939년 9월 전쟁이 시작되자, 야엘의 아빠도 치과의사 가운 대신 군복을 입고 전쟁터로 떠난다. 전쟁이 본격화되며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새엄마가 바느질거리를 붙잡고 돈벌이에 나서기도 한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아빠는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지만 전쟁터나 후방이나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는 상황에서 불평거리도 아니다. 이제 전쟁은 일상이 되었다. 폭격이 이어진 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 사람들은 익숙한 풍경이 되었고, 사이렌이 울리면 야엘의 가족은 이웃들과 함께 지하 대피소로 몸을 피한다. 이웃들과 함께 공포에 질려 있다가 조용히 노래를 하며 마음을 달래는 시간. 야엘에게 진짜 평화와 안식은 언제쯤 찾아올 수 있을까.
숨죽이고 두려움에 떨며 커튼 뒤에 서 있는 시간
우리에게 평화와 안식을 내려 주소서
언제나 역사는 지독한 ‘스포’가 될 수밖에 없다. 1942년 프랑스 남부에 비시 정부가 수립되자 갑자기 유태인은 공공의 적이 되어 여기저기에서 공격받는다. 전쟁은 모든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지만 누군가는 특별히 더 고통받는다. 노란별을 달고 기차에 올라 떠나간 사람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독일 유태인과 프랑스에 살던 유태인 난민들이 처했던 절체절명의 위기가 야엘과 에밀리에게도 찾아온다. 유태인 엄마는 이미 죽고 없는데, 외가 친척들도 다 외국으로 떠나 버렸는데, 유대교 행사에 그렇게 열심히 참여한 적도 없는데, 그저 어린아이일 뿐인데도 말이다. 그런 혼란 가운데에서도 열세 살이 된 야엘에게는 초경이 찾아온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 가능성,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라는 표지. 하지만 야엘이 무사히 자라 어른이 되고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될 수 있을까? 하늘에서 폭격이 쏟아져 내리고 죄없는 사람들이 줄줄이 끌려가 죽임을 당하는 무도한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건, 어른이 된다는 건 무슨 의미를 지닐까.
언제 어디서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감추는 것이 많다. 엄청난 비극 앞에서는 더더욱. 하지만 사실,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지 않다. 어른들이 은밀히 비밀을 나누는 동안, 어린이들은 이것저것 주워 들은 정보들을 모아 나름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어른보다 좀더 진실 앞에 가까이 다다가기도 한다. 비시 경찰을 피해 커튼 뒤에 숨어 있던 야엘이 죽음의 의미에 대해 통찰하는 장면에서처럼 말이다. 죽음이 눈앞으로 다가온 순간, 야엘은 어쩌면 더 이상 생각나지 않는 엄마를 저세상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동시에 죽고 나면 더 이상 볼 수 없는 얼굴들도 스쳐지나간다.
그런데 만약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생이 다시 한번 시작될 수 있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비탄과 고통이 아예 없었던 일이 될 수 있다면?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커튼이 확 젖혀진다. 이야기는 끝. 경찰에게 발각된 야엘과 에밀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알 수 없다. 멀고먼 시공간에서 야엘의 이야기를 들은 우리에게 이 결말은 비극으로 보인다. 하지만 부록을 지나고 나면 약간의 희망이 담긴 조그만 그림이 하나 나온다. 우리는 지나간 과거의 어느 한순간, 기적이 일어났기를 바라며 책을 덮는다. 슬픔과 고통을 책으로 읽을 때 느끼는 무거움을 안은 채. 지금도 세계 이곳저곳에서는 전쟁이 한창이고, 그곳에는 또다른 야엘과 에밀리가 커튼 뒤에 숨어 떨고 있을 것이다. 두 손을 모아 평화의 기적을 바라는 것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있을까.
p 3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 자신과 세상에 대한 깨달음은 대부분 커튼 뒤에서 시작되고, 커튼 뒤에서 끝났다.
p 48
“조금 길을 잃었지만 정말 똑똑한 사람이기도 하지.”
나탈리 고모의 의견이었다.
아빠는 뉘른베르크 법이 지성인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며 고모에게 고함쳤다.
“더 이상 유태인들은 ‘아리안’ 독일인들과 결혼도 못 하게 하고, 투표할 권리를 빼앗고! 상점과 공원의 입장도 금지하고! 의사나 약사, 변호사가 될 수 없도록 하고! 학교도 못 다니게 하는 것이! 그저 안타깝게도 근시안적 사고로 ‘방향을 잃은’ 천재의 생각이라고?”
p 78
걱정이라는 것은 참 이상하다. 보통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넘겨주면, 우리에게는 그것이 남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걱정이라는 것은 그렇지 않다. 걱정은 아무리 나누어도 우리에게서 없어지지 않으니 말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 뒤로 이어진 몇 달은 길고도 비참했다.
p 82~83
그 후 며칠 동안 두 번의 공습 경보가 울렸다. 첫 번째는 가짜 경보였지만 두 번째는 아니었다.
“소피! 소피! 소피!”
누군지 모르겠지만… 소피는 결국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틀거리던 우리는 그 광경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죽는 것은 또 얼마나 쉬운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p 114
독일이 점령한 북부 프랑스에서는 수천 명의 유태인 가족들이 체포되었다. 대부분 동유럽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P 127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갑자기 답이 떠올랐다. 명확하고 분명하게. 전에는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이렇게 간단한데… 다시 태어난다면, 나 자신으로 태어나고 싶다.
지은이_사라 델 주디체
1998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나 극작가, 어린이책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밀라노의 IED(유럽디자인대학)에서 일러스트레이션으로 학사를, 앙굴렘의 EESI(유럽고등이미지학교)에서 만화로 석사 학위를 마쳤다. 『커튼 뒤에서』는 2022년 출간한 첫 책으로, 어린아이 눈에 비친 홀로코스트에 대해 이야기한다.
옮긴이_박재연
서울에서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파리에서 미술사와 박물관학을 공부했다. 시각 이미지가 품고 있는 이야기들이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달라지는 여러 모양새를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아주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예술과 역사에 관한 번역과 집필, 강연과 기획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