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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거기에 놓아두시면 돼요

캉탱 쥐티옹 ·그림 | 오승일 옮김

 

변형판 (200*267mm) | 208| 34,800

발행일 | 20231125

펴낸곳 | 바람북스

ISBN | 979-11-973817-9-9

원제 | LA DAME BLANCHE

꽃은 거기에 놓아두시면 돼요

  • 코클리코 요양원에서 보내는 마지막 생애

    우리의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

     

    2022년 기준 OECD 회원국의 평균 기대 수명은 80.5, 한국인의 평균 기대 수명은 83.5세다. DNA 분석을 통해 확인된 인간의 자연 수명이 38세라고 하니 현대인은 경이로울 정도로 오래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장수는 과연 축복일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옛사람들의 말은 오늘날에도 유효할까? 고령에 따른 노화와 질병, 외로움, 빈곤 등은 이미 사회 문제가 된 지 오래다. 기억이 흐려지고 온몸의 관절이 삐걱거려 더 이상 스스로의 몸과 정신을 통제할 수 있는 노인들에게 존엄한 삶이란 어떻게 가능할까.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행복하고 존엄하게 산다는 건 도무지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꽃은 거기 놓아두시면 돼요는 노인 요양원을 배경으로 노년의 삶을 그려 보이는 그래픽노블이다. ‘코클리코 요양원에 들어온 노인들은 누군가의 수발 없이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고, 가족들의 돌봄도 여의치 않은 인물들이다. 휠체어를 타거나 치매를 앓는 게 아니었다면 얼마든지 혼자 식사를 하고 샤워를 하는 등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했을 테고, 그랬다면 굳이 요양원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이든 부모의 이삿짐을 부려놓고 떠나는 자식들은 얼마간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다. 늙은 부모를 돌보느라 젊은 자식의 삶을 희생할 수는 없을 테니까. 게다가 노인의 돌봄을 가족에게 미루는 건 현대 국가에서 피해야 할 해악이다. 따라서 집처럼 안락하고 다정한 돌봄이 있는 노인 요양원이란 오늘날 사회복지의 대표적인 얼굴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노인들이 시설에서 보내는 마지막 생애가 어떤 내용으로 채워지는가이다.

    이상하게도 꽃은 거기 놓아두시면 돼요는 이야기의 초점을 노인들의 웰다잉에 맞추기보다 약간 비껴서 그들을 돌보는 간호사 에스텔에게 정조준한다. 에스텔은 남자친구와 지지부진한 연애를 하고 휴식 시간에는 동료와 시시덕거리고 가끔은 클럽에 가서 술에 취하는 평범한 청년이며, 동시에 누군가의 말년을 지켜보고 돌보고 마침내 죽은 이들의 시신을 닦아 떠나보내는 돌봄 노동자다. 목욕시키던 남성 노인의 신체 변화에도 도리어 위로를 건넬 만큼 다정하고 섬세한 에스텔은 노인들을 돌보는 동안 어떻게든 평안한 나날을 보내게 해주려고 애를 쓴다. 젊은 시절의 기억 속에 잠겨서 에스텔을 동성 애인으로 여기는 노인이나 평생 공장 노동자로 살았으면서 자신이 프라하 주재 프랑스 대사였다고 주장하는 노인을 대할 때 에스텔은 그들의 판타지에 적극 동조한다. 때로는 가족들의 원성을 사고 상사에게 경고를 듣기도 하지만 진짜 삶과 진짜 기억, 지금 여기에서의 만족스러운 시간 중 무엇이 중요할까. 요양원의 노인들은 그저 무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여야 할까?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떠나고 나면 돌봄 노동자는 냉정한 얼굴로 빈 침대를 정리하고 새로운 입소자를 맞으면 그만인 걸까?

     

    우리는 모두 노인이 되고 언젠가 죽는다

    돌봄의 순환과 그 아름다움에 대하여

     

    꽃은 거기 놓아두시면 돼요를 펼치면 얼음처럼 푸른색과 흰색을 기본으로 하는 서늘한 이미지들이 모든 책장마다 가득하다. 이따금 등장하는 빨간 입술과 담뱃불, 알록달록한 꽃들은 우리 삶에 가끔씩만 존재하는 기쁨이나 즐거움처럼 보인다. 특히 주름과 검버섯으로 가득한 노인들의 얼굴은 생생하고 리얼하지만 동시에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해낸다. 요양원에 입소한 노인들에게는 각자의 삶이 있다. 기억을 잃어버린 엄마에게 가족 앨범을 보여주는 딸, 기꺼이 할아버지의 대화 상대가 되어주는 손녀처럼 규칙적으로 방문하는 가족들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가족들의 발걸음이 뜸해지고 노인들은 점차 잊혀져 간다. 노인들도 기력이 쇠하고 가족에 대한 기억도 흐릿해지니 피차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존재도, 관계도 스르르 소멸해가는 삶. 그러나 여전히 노인들의 삶은 계속되고 있고, 에스텔은 그 속에 함께 있는 존재다. 평생 이루지 못한 꿈과 죽을 때까지 남는 회한 같은 것들을 뒤늦게 환상 속에서나마 충족시킬 수 있다면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문제는 에스텔이 노인들을 돌보고 일상적으로 죽음을 맞는 동안 거듭해서 이별과 상실을 경험해야 한다는 데 있다. “내가 애정을 가졌던 사람의 시신만 벌써 수백 구를 봤어. 누구도, 진짜 어느 누구도 괜찮냐는 말 한 마디로 우리를 챙겨준 적 없어.”

    돌봄 노동자에게 맞는 마음가짐과 태도는 무엇일까? 가족의 영역에 있던 돌봄이 공식적인 노동이 되면서 이따금 돌봄은 차갑고 의무적인 행위로 치부될 때가 있다. 누군가를 먹이고 씻기고 대화를 나누는 일들이 아무런 감정 없이 가능하기라도 한 것처럼. 에스텔은 죽은 노인들이 남기고 간 물건들을 하나씩 빼돌려 서랍 속에 고이 모으고 자신에게 이 정도 유품을 가질 권리쯤 있다고 주장한다. 에스텔에게 노인들은 처리해야 할 일거리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이자 사랑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노인들을 돌보다가 떠나보내는 동안 에스텔이 경험하는 상실감은 단순히 지나치게 예민하고 인간관계에 과몰입하는 성향 때문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모두 노인이 되고 언젠가 죽는다. 그러니 요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들이 어떻게 완벽한 타인일 수 있을까. 에스텔이 느끼는 혼란과 슬픔, 비통함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일 것이다.

    생애 주기상 인간은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돌봄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질병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 너무 어리거나 너무 늙은 사람을 돌보는 것은 공동체가 마땅히 나눠야 할 책임이다. 우리는 모두 서로를 돌보고 돌봄을 받을 수밖에 없다. 내가 너와 다르지 않다는 걸 제대로 이해하고 타인에게 감정 이입을 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야기와 예술이 가진 진짜 효용일 것이다. 꽃은 거기 놓아두시면 돼요에서 이야기의 막바지에 이르면 독자들은 충격적이지만 지극히 당연한 장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 겸허하게 우리의 삶을 통시적으로 돌아보게 될 것이다. 꽃은 거기 놓아두시면 돼요는 밀도 높은 서사를 통해 삶과 죽음, 돌봄, 돌봄 노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기를 권하는 한편, 서늘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감상하는 예술적 재미도 담아낸 그래픽노블이다. 죽음 앞에 선 우리 모두가 읽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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