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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동안

유디트 바니스텐달 지음, 김주경 옮김 | 변형판 (175*230mm) | 280| 32,000원 | 발행일 2022311일 | 펴낸곳 바람북스 | ISBN 979-11-973817-1-3 [07860] | 원제 David les femmes et la mort

당신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동안

  • 아버지가 죽어가는 동안

    우리 모두는 그의 곁에서 새로운 삶을 준비합니다

     

    생명은 유한하고,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는다. 그러나 죽음이 보편적이고 공평하다고 해서 받아들이기 쉬운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이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라면 더더욱. 사별이란 다시는 볼 수 없는 헤어짐이라 애통하고 한 존재가 영영 사라진다는 사실 때문에 절망스럽다. 하나의 죽음은 얼마나 많은 슬픔과 고통을 유발할 것이며, 거기에는 얼마나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유디트 바니스텐달의 그래픽노블 당신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동안은 한 남자가 시한부 선고를 받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를 둘러싼 상황을 담담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의사가 ‘상문상 후두암을 통보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에서 주인공 다비드는 얼이 빠져 보인다. 다비드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은 그럼 타마르는?”이다. 이제 겨우 아홉 살이 된 늦둥이 딸 타마르. 모든 부모가 그렇듯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곁에 있어 줄 수 없다는 것은 눈앞이 깜깜한 일이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공포가 찾아온다. 죽음, 아득하고 도무지 알 수 없고 두려운 그 무언가. 다비드의 환상 속에서 일찍 세상을 떠난 전부인 줄리아가 나타나 위로를 해주지만 사후세계나 행운의 마스코트 같은 걸 믿어본 적 없는 다비드는 그저 막막할 뿐이다. 다비드는 어떤 경로를 거쳐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될 것인가.

    당신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동안은 다비드와 다비드의 가족들이 죽음을 맞닥뜨리는 모습을 하나하나 초점을 바꿔가며 들여다본다. 다비드에게는 아내와의 사별 후 재혼한 젊은 아내 폴라, 폴라와의 사이에서 얻은 타마르, 이미 성인으로 비혼모가 된 딸 미리암, 미리암의 아기 루이즈가 있다. 책의 앞부분에는 간략한 가계도가 그려져 있는데 다비드의 가족은 모두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내와 딸, 손녀들을 거느린 아버지는 대체로 가족 내 유일한 남성으로서 좀더 강한 책임감과 힘을 요구받곤 한다. 다비드가 암의 진행에 따라 목소리를 잃는다는 건 여러 의미를 담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다비드가 죽어가는 동안 다비드를 돌보고 여전히 계속될 일상을 지속하는 여성 인물들은 어떤 의미에서 가부장제의 전복을 실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단순히 여성에게 특화된 돌봄을 강조하기보다 가족 구성원들이 저마다 자신의 삶을 유지하려 애쓰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절망에 빠지지만 대체로 담담하게.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오늘 하루를 살아간다

    당신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동안은 미리암, 타마르, 폴라, 다비드에게 각 장을 할애하고, 인물 각각에게 고유한 색깔과 딱 맞는 시를 한 편씩 건넨다. 미리암은 빨강, 타마르는 푸른색, 폴라는 검정, 그리고 다비드는 흰색. 미리암이 여행 중 처음 만난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 후 루이즈를 낳는 장면은 다비드의 암 선고와 오버랩되며 삶의 순환과 지속성을 드러내준다. 아버지가 죽겠지만 미리암은 아이를 키우며 살아갈 것이고 다비드의 가계는 이어질 것이다. 한편, 아직 어린 타마르에게 아빠의 죽음은 불가해하다. 죽음이 영영 이별하는 거라고? 그렇다면 방법을 찾으면 되잖아! 그리하여 타마르가 친구와 함께 아빠를 미라로 만들자고 계획하는 것은 끔찍하다기보다 애틋하다. 아내 폴라는 사정이 조금 복잡하다.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 보낸 후 아빠의 빈자리를 채우며 어린 딸을 키우며 살아가야 할 폴라에게는 다비드의 죽음이 슬프고 고통스러우면서도 화나는 일이다. 상실감과 삶의 무게가 이중으로 덮쳐온다. 당장 폴라의 일상은 어떻게 될까. 누구보다 다비드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든 폴라는 애써 죽음을 외면하고 부정하지만 달라질 건 없다. 그리하여 마침내 폴라는 죽음을 받아들인다. 다비드는 떠나겠지만 사랑의 기억은 남을 테니까.

    당신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동안은 그래픽노블의 장점을 십분 살려 인물의 표정과 장면을 통해 다양한 감정을 그려 보여준다. 독자는 침묵 속에서 뭐라고 딱 집어 말할 수 없는 자신의 감정에 귀 기울일 수 있으며 작가가 펼쳐놓은 다양한 장면들 속에서 나름의 진실을 찾아볼 수 있다. 독자는 다비드가 죽어가는 동안, 한편으로 루이즈가 걷고 말하기 시작하며 점차 자라는 모습에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타마르가 호수에서 인어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풍선이 편지를 전해준다는 타마르의 상상과 믿음을 지켜주기 위해 엄마 아빠가 사소한 수고를 감수하는 장면은 재미있고 의미심장하다. 죽음이 엄연하듯 어린아이의 유년이 보호되어야 하는 것도 분명하다. 그리고 삶은 그렇게 따뜻한 삽화들이 갈피갈피 채워지는 것이기도 하다.

    여성 인물들이 저마다 각자의 삶을 이어가는 동안에도 다비드의 암은 시종일관 악화된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보다 공포스러운 것은 말할 수 없는 신체적 고통이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더 이상 못 보게 된다는 것은 두렵고 슬프지만 거듭된 수술과 항암치료로도 고통을 잠재울 수 없고 죽음이 안식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다비드는 절친인 주치의에게 죽여달라고 애원하며 주치의는 고심 끝에 비통한 마음으로 친구의 안락사를 돕는다. 안락사에 대한 판단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마지막에 이른 다비드가 독자들을 바라보며 홀가분하게 웃는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죽음은 정말 끝일까, 다비드는 평안에 이르렀을까, 남겨진 가족들은 이제 어떻게 지낼까.

    가까운 사람의 죽음 이후 슬픔과 상실, 애도에 대한 이야기는 많고 많다. 그러나 죽음의 과정과 그 죽음을 둘러싼 다양한 장면을 그림과 짧은 대사로 전달하는 그래픽노블을 만나는 것은 흔치 않은 경험일 것이다. 당신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동안은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관심사를 주제로 삼되 손쉬운 위로나 조언을 건네려 하지 않는다. 그저 어떤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생각과 감정, 관계들을 보여주며 죽음도 삶의 한 과정일 뿐임을 담담히 이야기한다. 죽음에 가까이 있거나 그렇지 않거나, 죽음에 관심이 많거나 그렇지 않거나, 여전히 살아가야 할 우리 모두가 함께 읽으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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