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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공주는 자정 이후에 죽는다

캉탱 쥐티옹 ·그림 | 박재연 옮김·

 

변형판 (200*267mm) | 152| 28,800

발행일 | 2023915

펴낸곳 | 바람북스

ISBN | 979-11-6210-216-9(07860)

원제 | Toutes les princesses meurent après minuit

모든 공주는 자정 이후에 죽는다

  • 자정이 지나면 마법이 풀리고 공주는 사라진다
    아름답고 행복하던 공주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1997831, 영국 웨일스의 공작 부인 다이애나(Diana, Princess of Wales)가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사진이 많이 찍힌 여성이었으며 민중의 왕세자비라고 불릴 정도로 사랑받던 다이애나. 그러나 찰스 왕세자와 이혼한 지 불과 1년 만에 파파라치에게 쫓기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옛이야기에서 공주들은 언제나 왕자와 결혼해 행복하게 잘살았습니다, !” 하는 결말을 맞는다. 그러나 현실 공주인 다이애나에게 왕자와의 결혼은 불안과 고통 그 자체였으며 끝내 파국에 이르렀다. 따지고 보면 공주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보석으로 장식된 왕관이나 드레스가 아니라 해피엔딩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공주는 판타지의 영역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해피엔딩이란 언제나 잠정적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픽노블 모든 공주는 자정 이후에 죽는다는 어느 평범한 가족이 보내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많은 이웃들이 휴가를 떠나고 조용한 여름날, 아홉 살 루루는 뒷마당에 만들어놓은 간이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고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누나는 선탠을 한다. 지난밤 아빠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엄마가 정원에서 잡지를 뒤적이거나 화단의 꽃을 돌보고 있는 걸 보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특별할 것도 없고 이상할 것도 없는 그저 그런 날 중의 어느 날. 그러나 잔잔한 일상의 표면 아래에는 어떤 이상 징후가 감지된다. 엄마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 누나의 위태로운 첫사랑, 그리고 루루가 마침내 자신의 성적 지향을 깨닫게 되는 것.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다이애나의 사망 소식은 평화로운 이들 가족의 심상찮은 배경음이다. 그리고 비극으로 끝난 공주 이야기는 라디오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놀러 온 이웃집 형 요요와 공주 놀이를 시도하던 루루는 결국 너 게이야?”라는 날선 질문을 맞닥뜨린다. 위험에 빠진 왕자를 구하고 입맞춤으로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는데, 그저 잘생긴 이웃집 소년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인데. 슬픔에 빠진 루루는 즐겨 가지고 놀던 공주 인형들을 수영장에 집어 던진다. “나한테 거짓말했어. 난 절대 너처럼 될 수 없다구!” 공주 이야기는 영원한 사랑과 행복을 약속하지만 사실상 해피엔딩은 실현되기 어렵다. 엄마 아빠의 결혼 생활이 무참히 실패한 것처럼, 누나의 첫사랑 상대가 알고 보니 제 성욕만 채우려는 파렴치한이었던 것처럼. 자정이 되면 마법은 효력을 다하고, 아름답게 치장한 신데렐라도 누더기를 입은 재투성이 아가씨로 돌아가지 않던가.

    그렇다면 공주의 꿈이란 언제나 허황되기만 한 것일까?

     

    여성, 퀴어 정체성 그리고 사랑의 좌절
    왕자 없는 세계에서 공주로 살아간다는 것

     

    모든 공주는 자정 이후에 죽는다는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제 어른이 된 작가는 퀴어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예술적 모티프로 적극 활용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했을 리 없다. 사랑하는 이웃집 소년에게서 받는 적대적인 눈빛과 거칠고 단단한 남성성을 칭송하는 아버지는 게이 소년 루루가 결코 진입할 수 없는 세계를 보여준다. 루루는 축구와 캠핑, , 전쟁놀이 같은 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 이성애 중심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세계는 루루에게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집을 떠나고 요요도 돌아가고 난 뒤, 절망에 빠진 루루는 누나 방으로 간다. 그리고 게이가 뭐냐고 묻는 남동생에게 누나가 말한다. “게이는 남자아이가 다른 남자아이랑 사랑에 빠지는 거야. 그리고 쉬운 일은 아니지. 그건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흠이 되는 세계라니, 미처 내뱉지 못하는 복잡한 말들을 뒤로 하고 누나는 동생을 꽉 껴안아준다. 이 밤이 지나고 나면 모든 게 변하겠지만 꼭 서로 껴안고 있으면 다 잘될 거라는 말과 함께.

    이 책에 실린 작가의 말에는 엄마와 누나들에 대한 애정과 감사 인사가 담겨 있다. “조용히 싸우면서도 종종 남자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누나들과 어머니는 다름 아닌 현실 속 공주들이다. 이 공주들은 용을 물리치는 주인공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용을 견뎌온 영웅이었으며 왕자의 구원을 기다리는 대신 다른 공주들과 손을 잡는다. 모든 공주는 자정 이후에 죽는다속 엄마와 누나는 모두 사랑의 좌절을 겪는 인물들이다. 엄마는 완벽한 가정을 꿈꾸었지만 아빠는 밖으로 나돌다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고, 누나가 진짜 사랑이라고 믿었던 상대는 연인의 고통이나 조심스러움을 아랑곳하지 않는 이기적인 남자다. 여름 햇볕에 잔뜩 달구어져 상처 입은 누나의 피부는 공주 판타지가 갖는 연약함을 드러내준다. 하지만 뜨겁게 열을 내뿜는 피부도 시간이 지나면 진정되고 마침내 회복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아침이 오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듯이, 여전히 삶은 계속될 테니까.

    엄마는 자신이 입었던 웨딩드레스를 자르고 꿰매어 루루에게 새 드레스를 선물한다. 사실 옛이야기에는 공주 말고 바느질하는 여성 인물도 곧잘 등장한다. 그리고 그런 여성들은 언제나 누군가를 구원한다. 엄마가 루루에게 하는 일도 그와 같다. 공주가 되고 싶은 아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다이애나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세간의 지나친 관심과 몰이해, 악의였다. 루루가 죽은 공주도 예쁜 드레스를 많이 입었느냐고 묻자 엄마는 다이애나가 바지 정장도 많이 입었으며 누구나 입고 싶은 옷을 입어도 된다고 말한다. 바지를 입은 공주와 드레스를 입은 소년. 누군가 손가락질하더라도 입고 싶은 옷을 마다할 이유는 될 수 없다. 이제 세 가족은 아버지가 없는 집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 아버지의 부재는 결핍이 될 수도 있지만 모두가 있는 그대로 존중받고 행복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가능하게 해줄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는 옛이야기의 해피엔딩을 바라는 대신 누더기 차림의 공주에게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왕자는 공주에게 진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아니, 세상의 모든 공주에게 왕자가 반드시 필요할까? 그리고 답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잘 짜인 서사와 겹겹이 자리잡은 상징과 은유, 아름답고 서정적인 그림 등 모든 공주는 자정 이후에 죽는다는 우리가 그래픽노블에 바라는 종합예술의 매력을 잔뜩 품고 있는 책이다. 여성과 퀴어, 가족, 어린이의 세계와 사랑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모든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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