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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 박스

지음 | 윤예니 옮김

변형판 200*280(mm) | 164| 29,800

발행일 | 2023530

펴낸곳 | 바람북스

ISBN | 979-11-973817-7-5 (07860)

원제 | Baby Box

베이비 박스

  • <피부색깔=꿀색> 감독 융 헤넨의 그래픽 노블

    내 삶의 비어 있는 몇 페이지를 찾아서

     

    아주 오래 전, 어린아이 하나가 복잡하고 떠들썩한 시장통에 버려진다. 유기된 아이는 전정식이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벨기에 양부모에게 입양된 다음 Jung’이 된다. 한국인 입양아 융은 낯선 언어, 다른 외양을 지닌 가족들 사이에서 자라는 동안 자기 자신에 대한 강렬한 의문과 이질감과 싸워야 했다. 정체가 분명치 않은 그리움도 피할 수 없었다. <피부색깔=꿀색>은 융 헤넨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 애니메이션으로, 한국인 입양아의 아픈 성장담을 들려준다. 꿀색 피부를 가진 이방인의 이야기는 2013년 안시국제애니메이션 영화제와 자그레브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등에서 수상하고 관객들의 찬사를 듣는 등 적극적인 호응을 받은 바 있다. 이 애니메이션은 한국 국외 입양의 실상과 수많은 입양아의 인권 문제에 주목하게 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의 뿌리와 존재 이유를 탐색하는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입양아들이 괴로워하는 정체성의 문제는 결국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근원적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는 셈이다.

     

    베이비박스는 융 헤넨 감독의 그래픽노블로, 이번에도 역시 버려진 아이의 뿌리 찾기를 다룬다. 프랑스에 사는 한국계 주인공이 자신의 의문스러운 출생에 대해 탐색한다는 동일한 모티프에서 출발하지만 이번에는 한국인 부부에게 입양된 한국인 아이의 이야기다. 자신이 엄마 아빠의 친딸이라는 것을 단 한번도 의심하지 않던 주인공 클레르 김은 엄마가 죽고 난 뒤에야 자신의 비밀이 담긴 상자를 건네받는다. 그 안에 담긴 입양 서류와 입양 서류에 잔득 적힌 한국어. 클레르는 엄마 아빠의 친딸이 아니고, 엄마 아빠는 11개월 된 아기를 입양한 것이다. 언젠가 진실을 털어놓으려 한 것 같지만 엄마가 망설이는 사이 아기는 성인이 되었고 엄마는 그만 세상을 떠났다. 여기 묻혀 있는 비밀의 끝은 어디까지 이어질까.

     

    검은 머리를 빨갛게 염색하고 연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져볼까 고민하던 클레르가 그저 무난하고 평탄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민자의 2세로, 인종차별이 만연한 유럽에서 아시아 여자로 살아가는 데 고충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테니까. 클레르의 빨간 머리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는 일이나 동생 쥘리앵이 킬트 전사 복장을 하고 스코틀랜드 중국인이라고 놀림을 받는 상황은 이민 2세가 불분명한 정체성을 일부러 과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노골적인 인종차별이 나쁜 일이라는 게 명명백백한 상황이라면 조금 불편하긴 해도 나름 돌파구나 해법을 찾았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입양아였다고? 친부모에게 버림받고 뿌리도 없이 살아왔으면서 정작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고? 이것은 유럽에 사는 빨간 머리 아시안 여성이 단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무척이나 낯설고 무거운 질문이다.

     

    어린 시절 쪽지를 넣은 유리병을 바다에 던지곤 했다

    날 구하러 와줘요, 아름다운 이방인이여.”

     

    클레르는 자신의 삶이 몇 페이지가 비어버린 책과 같다고 느끼며 비어 있는 챕터를 채우기 위해 모국인 한국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비어 있는 몇 페이지 사이 어디엔가 베이비박스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기의 체온을 유지하고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그러나 어찌되었든 아기를 버릴 수 있도록 만들어진 박스. 버려진 아이의 피난처이자 작은 우주. 클레르는 그 대단한 박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좀 보려고, 어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장소로는 영 이상하지만 그저 확인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베이비박스를 찾아간다.

     

    참전 군인 출신의 미국인 목사가 운영하는 시설에는 분유와 기저귀가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고, 아기를 넣을 수 있는 베이비박스는 냉장실이나 아파트 쓰레기 투입구, 혹은 감압실처럼 생겼다. 어쩌면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장소 같기도 하다. 클레르는 베이비박스를 운영하는 미국인 목사를 만나 자신이 버려졌던 날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한편, 목사의 양아들이자 베이비박스 일을 돕고 있는 청년 민기를 만난다. 민기는 자신도 베이비 박스에 버려진 아이였으나 다리에 선천적 장애가 있어 누구에게도 입양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전히 이틀에 한 번 꼴로 베이비박스에는 아기가 들어온다는 사실도.

     

    <베이비박스>는 검은색 펜과 연필, 물감의 질감이 두드러지는 흑백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유일하게 붉은 별색을 사용한다. 클레르의 염색한 머리카락, 남동생이 입은 킬트 스커트의 깅엄 체크무늬, 엄마가 좋아하던 개양귀비꽃, 순희 이모가 차려준 한국식 식탁과 아빠의 요리는 모두 빨강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빨강은 클레르가 가진 유년의 기억이기도 하고 혼란스러운 정체성이기도 하고 한국인이라는 확인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다. 성당에서 기도하던 엄마가 꽉 쥐고 있던 십자가도, 칼로 그어진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도 붉은 색이다. 출산도, 탄생도, 간절한 기도도 핏빛을 피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피처럼 붉은 색은 못 본 척하거나 흘려버리기 힘들다. 우리는 누구나 빨강색에 놀라고 들여다보고 눈부셔한다. 따라서 마지막에 클레르가 빨간 머리를 다시 검정으로 물들일 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기게 된다.

     

    입양아의 뿌리 찾기를 다룬 <베이비 박스>는 비교적 단순한 서사와 익숙한 질문을 던져 주지만 거기에 담긴 여러 겹의 이야기는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미국인 목사는 무엇을 속죄하기 위해 버려진 아기들을 구하기 시작했을까? 볼품없는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버려두고 자신의 정체를 지운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슬픈 사연을 갖고 있었을까? 민기처럼 오랫동안 버려진 채로 지내던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한국인 입양아로서 <피부색깔=꿀색>을 만들었던 융은 이번에는 모든 입양아들의 공통된 질문 앞에 선다. 너는 어디에서 왔는가. 너의 빈 페이지에서 무엇을 읽어내고 싶은가. 클레르가 미국인 목사에게 받은 봉투에는 이름도 얼굴도 모를, 아마도 평생 죄책감을 지고 살아갈 젊은 엄마의 짧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 “나를 용서해 줘, 아이야.” 클레르는 마침내 비어버린 챕터를 채울 수 있었을까? 그 답은 이 아름다운 그래픽노블을 읽는 우리 모두가 들려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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