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북극곰 왈루크

 

북극곰 왈루크

  • 기후 위기의 최전선, 북극에서 만나는 위대한 이야기
    홀로 남은 어린 북극곰은 어떻게 전설이 되었나


    북극곰은 다 자란 수컷이 700kg에 이를 정도로 덩치가 크고 한 번에 100km를 헤엄칠 정도의 지구력을 자랑하는, 현존하는 곰 중 가장 큰 곰이다. “북극곰은 사람을 찢어!”라는 인터넷 밈은 이 하얗고 거대한 동물의 힘과 포악함에 대한 경탄을 담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북극 생태계의 최강자 북극곰은 기후 위기를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부족해지고 북극 서식지가 파괴되면서 멸종위기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북극곰이 비쩍 말라 가죽만 남은 채 먹이를 찾아 헤매거나 망망대해에서 좁디좁은 얼음판 위에서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이미지는 기후 위기가 얼마나 시급하고 중대한 문제인지 보여준다. 스페인 그림책 『북극곰 왈루크』는 바로 그 위기 상황을 배경으로 북극곰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주인공 왈루크는 이제 막 엄마와 떨어져 자립을 시작한 어린 북극곰이다. 왈루크가 엄마와 헤어진 것이 생애 주기상 자연스러운 단계에 이르러서인지 모종의 비극적인 사건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왈루크가 알 수 있는 건 갑작스레 곁에 있던 엄마가 사라지자 지독한 배고픔과 외로움이 시작되었다는 사실뿐. 북극곰의 주식은 바다표범이지만 한 덩치 하는 바다표범들이 홀로 사냥에 나선 어린 북극곰에게 호락호락 잡힐 리 없다. 어쩔 수 없이 해초나 죽은 물고기를 주워 먹고 북극갈매기의 알을 훔쳐 먹고 있던 왈루크 앞에 커다란 수컷 북극곰 한 마리가 나타난다. 한때 600kg에 달할 정도로 건장했지만 지금은 너무 나이가 많아 추위를 견딜 만한 지방도 많지 않은 북극곰 에스키모다. 홀로 살아가기엔 취약하고 외로움에 시달리던 왈루크와 에스키모는 이제 서로를 의지한 채 생존을 이어 나간다.
    경험 많은 에스키모는 왈루크에게 북극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지식을 알려준다. 바다표범을 사냥하기 위해 숨구멍을 지키고 있는 법이나 언제나 북극곰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북극여우를 무시해야 하는 이유 같은 것들이다. 대신 왈루크는 냄새를 맡지 못하는 에스키모 대신 주변 상황을 살피고 안내하는 역할을 맡는다. 왈루크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다. 왈루크는 인간과 인간이 타고 다니는 기계들, 그 기계들이 지나다니는 아스팔트, 인간들이 먹다버린 음식 쓰레기를 주워 먹을 수 있는 장소 들에 대해 알아가는 한편, 인간의 잔인하고 비정한 면모들에 대해서도 배운다. 에스키모의 엄마와 동생이 어떤 식으로 인간에게 죽임을 당했는지, 에스키모가 물어뜯은 인간의 다리는 어떤 맛이었는지 등등 왈루크가 인간에 대해 알아갈수록 생존은 너무나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지구온난화와 서식지 파괴, 줄어드는 해빙……
    그러나 살아가는 데 드는 노력은 언제나 가치 있다


    『북극곰 왈루크』는 북극곰의 성장담을 칸만화의 형식을 빌려 유머러스하고 유쾌하게 그려 보이는 한편 북극곰의 생태에도 충실하다. 바다표범이 숨쉬러 나올 때를 기다리거나 북극여우를 쫓느라 기운을 빼는 북극곰 이야기는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웃기면서도 북극지방의 생존방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왈루크에게도 인간의 존재가 그림자처럼 드리워진다. 인간들은 단순하지 않아서 경험이 많은 에스키모도 왈루크의 질문에 대해 “인간? 설명하기가 어려운데……”라며 곤란해할 정도다. 인간은 육체적으로 무척 허약하지만 지구 최강 북극곰을 사냥하는 유일한 동물이며 북극의 해빙을 파괴하는 주범이면서 북극곰 보호에 나서기도 한다. 그들은 인정사정없는 북극곰 사냥꾼이자 순진한 관광객이기도 하고, 북극곰 연구와 보호에 나선 과학자들과 활동가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원래 의도와 상관없이 인간의 모든 활동은 북극곰들에게 해로울 수밖에 없다. 에스키모는 왈루크를 데리고 쓰레기를 뒤지러 갔다가 인간이 놓은 덫에 걸리고 만다. 도시에 너무 가까이 다가온 북극곰을 포획해 돌려보내기 위한 덫이지만 진짜 문제는 인간이 북극곰 서식지에 너무 가까이 다가간 것이 아닐까? 늙은 에스키모에게 안락사 판정이 내려지는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일인가.
    혼자 남은 왈루크는 오로라를 통해 위대한 북극곰 나누크의 환영을 본다. 모든 인간을 합친 것보다 더 강하고 똑똑한 나누크. 나누크 이야기는 에스키모가 왈루크에게 전해준 북극곰의 전설이자 역사이다. 에스키모가 들려주는 위대한 북극곰 나누크의 전설이나 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땅 '킹머사리아토픽수아크'에 대한 이야기들은 왈루크 혼자라면 터득할 수 없었던 생존서사에 가깝다. 인간의 눈에는 에스키모가 멍청한 늙은 곰에 지나지 않겠지만 왈루크에게는 현명한 스승이자 스토리텔러이다. 에스키모와 왈루크의 관계는 일방적인 가르침을 주고받는 사제지간처럼 보여도 사실 왈루크는 에스키모에게 계속 살아가야 할 생존 의지를 북돋워주고 위대한 북극곰의 역사를 이어나가는 존재다. 그리하여 에스키모는 다른 북극곰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언젠가는 나누크처럼, 이 꼬마의 이야기가 전해질 거야.” 그리고 이러한 자기충족적 예언은 진짜로 실현된다. 왈루크가 다른 북극곰들을 이끌고 인간의 기지로 쳐들어가 에스키모를 구해낸 것이다.
    『북극곰 왈루크』는 인간이 초래한 환경 위기의 최전선에서 북극곰들이 겪는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 인간은 탄소를 발생시켜 오존층을 파괴하고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침범하는 악당인 동시에 북극곰이 멸종 위기에 놓였다는 사실에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끼고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북극곰을 먹이로 유인해 개체수를 확인하고 칩을 심고 이동시키는 등 인위적인 개입은 왈루크의 성장과 자립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왈루크는 야생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간다는 자긍심을 가질 때 비로소 어엿한 북극곰이 될 수 있다. “먹이를 구하는 데 드는 노력을 언제나 가치있게 여겨야 한단다.” 물론 에스키모의 가르침이 모든 북극곰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에스키모를 탈출시키는 근사한 습격을 벌인 후에도 북극곰들은 다시 공짜 정어리를 위해 인간의 탑 주위로 몰려들고 관광객들을 실은 기차 주위를 어슬렁거린다. 그러나 대세를 바꿀 수는 없어도 왈루크는 다를 것이다. 왈루크가 살아 있는 전설이 되었다는 짤막한 후일담은 생명의 위대함과 소중함을 되새기게 하며, 이것이야말로 바로 『북극곰 왈루크』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진실일 것이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