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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마이어

파울리나 스푸체스 지음 | 박재연 옮김

변형판 (218*290mm) | 168| 27,800

발행일 | 202347

펴낸곳 | 바람북스

ISBN | 979-11-973817-6-8 (07860)

원제 | Vivian Maier - A la surface d'un miroir

비비안 마이어

  • 유모, 간병인, 가사도우미, 그리고 거리의 사진 작가

    우리가 몰랐던 비비안 마이어의 놀랍고 이상한 삶

     

    2007년 미국 시카고에서 현상하지 않은 필름이 가득 든 상자가 하나 발견된다. 창고 사용료를 내지 못한 누군가의 물건이 경매로 나온 것이었는데 필름 속에 담긴 사진들은 심상치 않았다. 1950년대 뉴욕 길거리에 주저앉아 있는 취객들, 해변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남자, 쓰레기통에 담긴 곰 인형, 길거리 웅덩이에 비친 기다란 그림자, 그리고 유리창에 비친 카메라를 든 여자 등등 평범한 사람들과 삶에 대한 깊은 이해가 담겨 있는 데다 프레이밍과 감각이 뛰어난 사진들이었다. 무려 15만 장이나 되는 사진은 그간 한 번도 세상에 나온 적이 없는 것이었고, 비비언 마이어라는 무명작가의 사진들이 SNS를 통해 퍼져나가자 21세기 대중들은 열광했다. 그런데 도대체 비비안 마이어가 누구야? 이런 사진들이 어째서 뒤늦게 빛을 보게 된 거지? 놀랍게도 사진을 찍은 비비안 마이어는 평생 유모나 간병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간 가사 노동자였다. 병적인 수집벽이 있었으며 그렇게나 많은 사진을 찍으면서도 사진을 공개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생전에 그를 알던 사람들은 입을 모아 비비안 마이어가 유별나고, 비밀스럽고, 미스터리했다고 말한다. 언제 어디서든 상자형 카메라 롤라이플렉스를 목에 걸고 세상을 향해 셔터를 눌렀던 여자. 비비안의 이상하고 신비로운 삶과 사진의 세계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비비안 마이어 : 거울의 표면에서는 프랑스의 2000년생 그래픽노블 작가 폴리나 스푸체스가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책이다. 21세기에 태어나 체계적인 예술교육을 받고 일찍이 자신의 책을 펴내게 된 젊은 작가와 괴팍한 거리의 사진가 비비안 마이어는 여러모로 대조된다. 비비안 마이어는 한 번도 사진을 배운 적이 없었으며, 유산으로 받은 집을 처분하면서 구입하게 된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섰을 뿐이다. 그러나 무작위로 아무렇게나 찍은 듯한 사진은 순간순간의 진실을 뛰어나게 포착해낸다. 어떤 사람들은 모르는 채로 사진을 찍히고, 어떤 사람은 사진이 찍히는 순간 인상을 찌푸리며, 어떤 사람은 카메라 렌즈를 향해 어깨를 펴고 포즈를 취한다. 어른들은 취하거나 잠들어 있기도 하고 아이들은 울타리에 매달리거나 구두를 닦기도 한다. 비비안에게 사진은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고 포착하고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던 걸까. 사진 속에는 사람들의 움직임도, 거리의 소음도, 먼지를 피워올리는 바람도 담겨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이 담겨 있다.

    젊은 그래픽노블 작가 폴리나 스푸체스는 비비안의 사진을 천천히 들여다보고 꼼꼼히 자료조사를 하고 오래오래 생각한 끝에 붓을 든다. 파울리나의 붓끝에서 비비안의 흑백 사진은 색채를 입는다. 그리고 한 장 한 장의 사진 속에서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1952년 뉴욕에서 찍힌 취객들의 사진을 보자. 세 남자는 술에 잔뜩 취해 제 할 말만 늘어놓고 어깃장을 놓고 말다툼을 하다가 어느 뒷골목에 주저앉고 만다. “내 아들이 죽었어.” 지독하게 슬프고 너무나도 간단한 과음의 이유. 물론 비비안의 사진 속 모로 누워 정신을 잃거나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남자들에게 진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찰칵, 사진을 찍고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는 비비안 마이어도 사연을 알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70년 뒤 젊은 예술가 한 사람이 사진에 담긴 보편적인 비극과 고통을 읽어내는 것이다. 사진은 순간을 찍지만 말할 수 없이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으며, 어떤 이야기를 읽어내는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비비안 마이어 : 거울의 표면에서는 다소 어둡고 강렬한 색채의 그림을 통해 비비안의 사진을 읽는 방식 중 하나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두 개의 시대, 두 가지 예술 매체,

    이야기하고 싶은 열망과 관심을 불러일으키고픈 서로 다른 두 개의 욕망

     

    비비안 마이어는 어린 시절 사진작가 잔느 베르트랑의 집에 잠시 머무는 동안 카메라의 존재와 사진의 가능성을 경험한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기념일에나 겨우 한 장 찍을까 말까 한 사진은 비비안에게 열정과 애착의 대상이 된다. 유모로 일하는 집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선 거리에서, 휑한 해변이나 햇살이 비추는 공원에서 비비안은 롤라이플렉스를 내려다보며 프레임을 잡고 찰칵, 셔터를 누른다. “한때는 거기에 있었지. 내가 할 수 있었던 것들에 집착하면서.” 비비안의 사진은 시간을 기록하거나 증명하는 데 활용되거나 감상을 위해 발표되거나 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쓰임이 없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젊은 부동산 중개인에게 발견되어 현상되기 전까지는 그저 오랫동안 필름 안에 머물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유명한 갤러리나 박물관에서 거절한 사진들을 알아본 것은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디지털 시대의 사람들은 비비안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감동을 받는다. 사진이라는 예술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을지 순식간에 이해한 것이다.

    비비안 마이어 : 거울의 표면에서1929년에 태어나 수많은 사진을 찍고 2009년 사진을 떠난 비비안 마이어의 삶을 바탕으로 하지만, 이것은 허구의 이야기다.작가는 책을 마무리하면서 여기에 담긴 이야기들이 실제와 무관하며 순수한 작가의 상상으로 창작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야기의 말미에 노인이 된 비비안은 자신이 돌봐준 그웬이라는 아이가 자라 사진작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웬은 자신의 사진집과 함께 보낸 편지에서 당신이 없었다면 이 사진집은 나오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나왔다 해도 다른 모습이었겠지요.”라고 털어놓는다. 잔느 베르트랑의 카메라와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들, 그웬의 사진집으로 이어지는 연결과 흐름은 자연스럽고 타당하지만 한편으로는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접하는 모든 스토리와 예술은 딱 맞아떨어진다. 흐트러지고 사방팔방에 산재하고 흐리멍텅한 순간들을 모아 정리해놓은 것이 이야기이고 예술인 것이다. 비비안 마이어가 사진으로 포착해낸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거울의 표면에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아름다운 그래픽노블은 서로를 비추고 프레이밍하고 포착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비비안 마이어, 비비안의 사진에 담긴 이름 모를 20세기의 사람들, 비비안의 사진을 알아보고 열광하며 가치를 높여준 21세기의 사람들, 그리고 비비안의 삶과 사진에 매혹되어 그래픽노블이라는 또 다른 예술로 번역해낸 작가 폴리나 스푸체스까지. 우리 모두는 서로를 바라보고 되비추는 거울들이다. 알고 보면 인간의 삶의 다룬 모든 예술이 하고 있는 일이 그러하지 않나. 이 허구의 이야기를 읽노라면 실존했던 이상한 사진작가 비비안 마이어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이 알고 싶어진다. 어떤 예술이 진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놓는 경험을 할 때 우리가 으레 그러하듯이.

    여성에 대해 생각하고 창조하고 생산하는 일은 지극히 사적인 동시에 페미니즘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는 일이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단순히 여성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표가 될 수 없는 모든 존재들-헤테로 남성이 아니고 백인이 아니고 부유하지 않고 나이 들고 장애가 있고, 더 나아가 비인간인 모든 존재들에 대해 생각하는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서툴더라도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자기 안의 혼란을 고요하게 들여다보고 싶은 모든 여성들과 대표가 되지 못해 슬픈 모든 존재들에게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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